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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 소장의 한국 자동차 비사 泌史] ② 처음 본 차는 프랑스 공사 차

이탈리아제 란치아 굉음 내며 혼자 굴러다니는 기이한 광경 사람도, 소도 혼비백산 줄행랑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 사절이 주재국에서 본국의 선진 문화를 최대로 과시하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었다. 한국의 개화기 때도 그랬다. 한국의 초기 자동차 문화에 주한 서양 외교관들이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가 바로 1908년 3월 프랑스 공사의 자동차가 서울에 처음 출현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자동차가 나타나 백성들을 기절초풍하게 한 사건이다. "괙~괙~. 길 비켜요. 자동차 나갑니다." 서울의 본정통 거리(현재 충무로)에는 쇠 마차 한 대가 두꺼비 울음소리를 질러대며 굴러 다녔다.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이 쇠 괴물을 본 백성들은 혼비백산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던 영국인 기자 앨프레드 맨험이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1년 뒤 1909년 2월 20일자 영국의 화보지 '그래픽'에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삽화와 함께 이 광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자동차를 처음 본 조선인들이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들고 가던 짐도 팽개친 채 숨기에 바빴다. 어떤 사람은 이 쇠 괴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놀라 길가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들었다." 이를 보고 기절초풍해 달아나는 행인도 있었지만 그래도 배짱이 두둑한 젊은이도 있었다. 이들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자동차를 바라봤다. "아니 저것이 무엇인가. 당나귀가 끌지도 않는데 혼자 잘 굴러가네." "저것이 말로만 듣던 자동차라는 것일세." "저 마차 안에 앉아 굴렁쇠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양코배기'가 마부인가보다. 저 굴렁쇠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저 쇠 당나귀도 오른쪽으로 가네." '양코배기'는 바로 노랑 머리 파란 눈의 프랑스 공사였다. 성명 미상의 그는 1908년 3월 일본 고베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타고다니던 붉은색의 이탈리아제 란치아 승용차 한 대와 모터보트 한 척을 배에 싣고 부산항에 내렸다. 그런 다음 경부선 열차 편으로 서울까지 가져온 것이다. 프랑스 공사의 자동차는 일반 백성이 처음 본 자동차로 기록된다. 백성들은 귀신이 응얼거리는 듯 나는 엔진소리와 뒤꽁무니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제 스스로 굴러가는 기이한 광경을 구전으로 전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한.일 강제병합이 된 이듬해인 1911년. 일제는 조선에 주재하던 모든 외국 사절들을 강제로 추방해 자기 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때 프랑스 공사는 서울서 타고다니던 자동차와 모터보트를 가지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나 차가 낡은데다 다시 프랑스로 돌려보낼 수송 수단도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처분하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살 사람이 선뜻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자동차라는 것이 굴러다니는 무서운 기계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전할 사람이나 연료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수소문하던 끝에 한국인 비서의 도움으로 왕실에 팔 수 있었다. 이후 자동차는 순종 황제가 이따금 타고다녔다.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2011-05-27

[전영선 소장의 한국 자동차 비사-1] 임금님의 첫 차

즉위 40년 맞아 '자동거' 도입…미국서 이듬해 수입 포드 모델C, 캐딜락 분명치 않아…유럽차일 수도 갑오겨장 뒤 가마 못타게 된 대신들엔 인력거 하사 “폐하.” “말씀하시오, 탁지(度支)대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금번 칭경식(稱慶式)은 개화문명에 맞도록 신식으로 거행함이 지당한 줄 아옵니다.” “어떻게 말씀이오.” “폐하께서는 지금 서양에서 타고 다닌다는 자동거(自動車)에 대한 소식을 아시옵는지요.” “그야 외국공사들로부터 들어 대강은 알고 있소. 그리고 작년에 영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서절로 참관했던 청안군과 의양군에게 들은 적도 있소만….” “그 자동거라는 것이 빠를 뿐만 아니라 매우 편리하다고 하옵니다. 원하옵건대 이번 칭경식을 기념하는 뜻에서 서양으로부터 자동거를 한 대 들여와 폐하를 예식장까지 모시고저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아도 궁한 나라살림에 칭경식까지 열어 짐의 마음이 무거운데 내가 어떻게 그 비싼 자동거까지 타겠소.” “폐하! 이것은 폐하께서 날로 개명하는 밝은 뜻을 몸소 백성들에게 보이시어 이 나라에 개화 문명을 펼치시는 길이오니 아무쪼록 소신들의 주청(奏請)을 거두어 주옵소서.” 1902년 12월은 조선 왕가에 있어 매우 뜻 깊은 해였다. 고종이 재위 4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위기간 중 수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렇지만 40년간 임금의 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그래서 대신들이 뜻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어 고종을 위로하려 했다. 이 잔치를 '칭경식(稱慶式)'이라 했다. 고종은 대신들의 거듭된 주청에 마지못해 허락했다. 이어 거국적인 잔치 준비로 나라 안이 떠들썩했다. 그런데 몇몇 대신들이 기왕이면 이 기쁜 날 고종을 자동차로 연회장까지 모시자고 의견을 모았다. 고종황제로부터 어렵사리 허락이 떨어지자 탁지부대신(재무부장관) 이용익(李容翊)이 미국공사 호레이스 알렌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감."  "다름이 아니오라 칭경식 때 황제폐하를 모시기 위해 당신네 나라에서 자동거를 한 대 구입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시겠소?"  "그거 참 좋으신 생각입니다. 이 나라가 자동거를 들이려 하는데 어찌 도와드리지 않겠습니까. 염려마십시요 대감."  알렌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동차 판매업을 하던 친구 프레이저에게 승용차 한 대 보내 줄 것을 전보로 부탁했다.  이 시절 임금님과 대신들이 탈것이라고는 마차와 인력거뿐이었다. 개화 바람을 일으킨 갑오경장(1894년) 때부터 대신들은 가마 등을 못 타게 했다. 전차 기차 화륜선(증기선)이 나타난 세상에 옛날의 탈것을 고집한다는 것은 시대에 뛰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급 관리와 예식에서 공연할 기녀들은 칭경예식장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양 자동차를 혼자 타기가 미안했던지 고종은 탁지부 대신을 불렀다.  "여보시오 탁지부 대신."  "부르셨습니까 폐하."  "칭경예식장까지 조정의 대신과 귀빈들이 걸어가게 할 수 없으니 이왕이면 인력거를 한 백 대쯤 사들여와 그들과 기녀들을 태우는 것이 어떻겠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거든 그 인력거들을 전부 대신들이나 고급관리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시오."  이렇게 해서 자동차와 함께 인력거 100대를 일본에서 들여와 궁내 고급관리들의 관용차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902년 겨울 너무나 춥고 흉년이 들어 잔치를 베풀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다음해인 1903년 봄으로 칭경식을 연기했다. 정작 미국에서 들여온다는 이 자동차는 때를 맞추지 못하고 칭경예식이 끝난 뒤에나 도착했다.  역사책에는 "고종 어용으로 미국에서 자동차 한 대를 도입하였다"는 간단한 기록밖에 없다. 물론 그 차의 존재는 현재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미국에서 들여왔다는 고종의 첫 어차는 포드 모델C 아니면 캐딜락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회사는 칭경예식이 열렸던 1903년에 설립됐다. 따라서 실제 가져온 자동차는 미국이 아닌 유럽 쪽에서 사 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미 영국.독일.프랑스에서는 왕들이 탈 수 있는 리무진 형태의 큰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포드 또는 캐딜락은 왕이 없는 미국이기 때문에 호화로운 리무진은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임금이 운전석 뒤에 별도로 편히 앉을 수 있는 4인승 차를 몇 대 생산했기는 했다. 그래서 만약 미국 것을 들여왔다면 포드 모델C나 캐딜락이었다는 추측이 나름 설득력 있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201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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